덴샤궁 연혁

덴샤궁 연혁
덴샤궁(天社宮)은 신기의 근원인 다이이쓰(太一)를 모시고, 아베노 세이메이 공 이래로 전해진다고 하는 음양도의 제사와 역법을 오늘날까지 계승하는 궁입니다.
그 연혁은 아베노 나카마로 공, 기비노 마키비 공, 아베노 세이메이 공, 그리고 쓰치미카도가로 이어지는 전승에 바탕을 두며, 와카사 나타쇼의 성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덴샤궁’이라는 궁호
제112대 레이겐 천황 재위 중인 덴나 2년(1682), 칙선을 받들어 ‘덴샤궁(天社宮)’이라는 존칭을 하사받았습니다.
신체의 전래
본궁에 전해지는 연혁에 따르면 그 역사는 1,300여 년 전인 요로 원년(71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견당사로 당에 건너간 아베노 나카마로 공은 당시의 어려운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고 전해지며, 현종 황제를 섬겨 뛰어난 재능으로 깊은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가장 존귀하게 여겨진 영산 태산에서 하늘의 최고신 대원존신(大元尊神), 곧 다이이쓰의 신체를 받는 보기 드문 영예를 얻었습니다.
나카마로 공은 배운 여러 비법과 신체를 황실과 아베가에 전하라는 큰 명을 받고, 같은 견당사였던 기비노 마키비 공에게 그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와카사 봉안
기비노 마키비 공이 귀국한 이듬해 덴표 8년(736), 쇼무 천황은 헤이조쿄 북방의 와카사국 나타쇼를 ‘다이잔후쿤 제료 지행지(泰山府君祭料知行地)’로 정했습니다. 북쪽은 다이이쓰, 곧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자리하는 가장 존귀한 방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와카사에서 도다이지로 물을 보내는 ‘오미즈오쿠리’도 이 북방의 성수를 도읍에 바치는 신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키비 공의 귀국 뒤 신체는 가모가에 맡겨져 대대로 정성껏 지켜졌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나카마로 공의 뜻은 이루어졌고, 신체는 아베노 세이메이 공의 부친 아베노 야스나 공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로써 존귀한 신체는 아베가, 후대의 쓰치미카도가에서 봉사되었으며 다이이쓰의 신성한 계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에서 전국시대의 동란까지
헤이안 시대에 신체는 교토의 대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 공 저택 안 사당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오닌의 난으로 사전은 소실되었지만 신체는 다행히 화를 면해 제료지인 와카사 나타쇼로 옮겨졌습니다.
조쿄 2년(1488), 아베가의 후예 쓰치미카도 아리노부 경은 와카사 나타쇼에 사전을 재건했습니다. 쇼와 6년(1317)에 하나조노 천황은 이 땅을 쓰치미카도가가 다이이쓰 제사를 맡는 성지로 정했습니다. 아리노부 경은 이곳에 거성을 세우고 천궁 의식을 엄숙히 거행했습니다.
그 뒤 와카사 나타쇼는 백여 년 동안 국가 제사의 중심으로 깊은 숭경을 받았습니다.
에도 시대—전국 음양사의 관할
게이초 5년(1600), 쓰치미카도 히사나가(土御門久脩) 경은 세키가하라 전투 뒤 칙명으로 다시 교토에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와카사 나타쇼를 떠나 교토 교외 우메코지에 저택을 마련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에게 음양도 종가로 인정받아 가록을 하사받았습니다.
이후 쓰치미카도가는 에도 시대 내내 음양도 종가로서 중요한 지위를 지켰습니다. 덴나 3년(1683), 쓰치미카도 야스토미 경 대에는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공의 주인장과 레이겐 천황의 윤지를 받아 전국 음양사를 관할하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이때부터 천황이나 쇼군이 바뀔 때마다 새 시대의 안태를 기원하는 국가 제사 ‘덴초치후사이(天曺地府祭)’를 거행했습니다. 본궁의 전승에 따르면 고미즈노오 천황부터 고메이 천황까지 열네 분의 천황, 이에야스 공부터 이에모치 공까지 열네 분의 쇼군 시대에 이 대제가 엄숙히 봉행되었습니다.
또한 궁중 가시코도코로를 20년마다 조영할 때에는 구전을 여러 차례 하사받는 보기 드문 영예도 입었습니다.
메이지의 시련과 신앙의 계승
메이지 유신의 변화는 덴샤궁에 큰 시련을 가져왔습니다. 메이지 3년(1870) 윤10월 17일, 메이지 정부가 ‘덴샤 신도 금지령’을 내리면서 음양사라는 존재 자체가 금지되었습니다. 이 포고로 사전은 철거되었고, 쓰치미카도가는 교토 저택과 천문대 등 제사의 거점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역대 당주는 유신 뒤 78년 동안 신체를 지켜 냈습니다. 다이이쓰 신앙은 절기와 역법, 신사 속에 살아 있으며 일본 문화와 정신의 깊은 곳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쇼와 시대의 재흥
쇼와 17년(1942), 쓰치미카도 자작가 당주 쓰치미카도 히로테루(土御門熙光)를 총재로 ‘쓰치미카도 신도 동문회’가 결성되었습니다. 히로테루 공의 부친 하루요시 공의 본가이자 모토이세 신궁의 대궁사를 지낸 미무로도가의 후원과 교토를 중심으로 한 많은 신사·사찰의 지원을 받아 덴샤궁 재흥이 시작되었습니다.
히로테루 공이 세상을 떠난 뒤 그 뜻은 동생 쓰치미카도 노리타다(土御門範忠) 경에게 이어졌습니다. 쇼와 21년(1946) 5월 21일, ‘덴샤 쓰치미카도 신도’로 재흥을 이루었습니다. 같은 해 쓰치미카도가를 대대로 섬긴 친족 후지타가 제37대 당주 후지타 겐도(藤田乾堂)가 와카사에서 교토로 올라와 같은 일족과 문중 사람들과 함께 덴샤궁의 복원에 힘썼습니다.
쇼와 29년(1954) 1월 11일, ‘종교법인 덴샤 쓰치미카도 신도 본청’으로 문부대신의 인증을 받아 본부를 설치했습니다. 관장에는 쓰치미카도 노리타다, 대표 겸 청장에는 후지타 겐도가 취임하여 다이이쓰 제사를 미래로 전할 체제가 마련되었습니다.
전쟁 직후의 어려운 시대에도 쓰치미카도가와 동문들의 정성 어린 노력, 교토를 중심으로 한 많은 신사와 사찰의 지원으로 신체는 한때 교토에 임시로 모셔졌다가 다이이쓰의 성지인 와카사 나타쇼로 다시 천궁되었습니다.
이 재흥 때 쓰치미카도가와 이세의 인연으로 고타이진구 네기 가문의 후예 아라키다 다케쿠니가 쓴 ‘다이이쓰(太一)’ 글씨가 봉납되었으며, 지금도 신전 앞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곳에는 다이이쓰의 존귀한 신체가 엄숙히 모셔져 있고, 그 신앙은 역법과 함께 살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덴샤궁의 연혁은 다이이쓰의 신체를 받들고 음양도의 제사와 역법을 지켜 전해 온 발자취 그 자체입니다.


